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버트 후버 (문단 편집) === 유능한 행정가이자 지식인 === [[아이오와]] 출신으로, 최초의 서부 출신 대통령이다.[* 19세기 [[남북전쟁]] 이래 이어지는 [[오하이오]] 출신 공화당 대통령의 맥을 끊은 인물이기도 하다. 그를 제외하면 서부 출신 공화당 대통령은 [[리처드 닉슨]](캘리포니아 출신) 정도고, 굳이 더 따진다면 [[캘리포니아]] 주지사를 지낸 일리노이 출신 [[로널드 레이건]] 정도가 있다.] 8세에 고아가 되어 [[오리건]]주로 이동해 [[퀘이커]]교도인 삼촌 슬하에서 자랐으며 [[캘리포니아]]의 [[스탠퍼드 대학교]]에 진학하여[* [[1891년]]. 스탠퍼드가 설립된 해에 들어간 것이다. 스탠퍼드는 개교한 해에는 수업료를 받지 않아서 학교를 공짜로 다녔다.] 지질학, 광산공학을 전공, 관련 학위를 취득한 이후 1897년 [[호주]]의 영국계 [[광산]]기업에 취직하여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 대략 15만 달러의 봉급을 받았다고 한다.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1년 만에 중간관리직으로 승진하였고,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한 다음에 광산기사와 국제[[사업가]]로 세계를 돌면서[* 청나라 황제의 광산업 자문관으로 일하기 위해서 신혼여행을 청나라로 갔다. 그런데 하필 [[톈진]]에 머무르던 때에 [[의화단 운동]]이 일어나서 거류민들과 함께 고생해야 했다.] 놀라운 활약을 펼쳐 30대엔 이미 큰 [[부자]]가 되었다. 그 이전인 20대 후반에는 [[남아공]], [[호주]], [[중국]] 등을 돌면서 큰 사업을 꾸렸는데, 어찌나 바삐 돌아다녔는지 [[청혼]]도 [[호주]]에 있을 때 아내에게 국제전보를 보내서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. [[1914년]]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벌어졌을 때 [[영국]] [[런던]]에 머물던 중 연합국 구제활동의 책임자로 발탁되었고, [[벨기에]] 구제위원회 의장직을 맡아 전쟁 중 대규모의 식량분배 계획을 관리하고 활발한 구호활동을 펼쳤으며 구호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담당했다. 그러던 중 [[1917년]] 4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미국 식량청 청장이 되어 미국의 식량 생산을 촉진하고 분배하는 일을 주도했고, [[1918년]]에 다시 유럽으로 가서 사재까지 털어 가며 적극적으로 구호활동에 매진했다. 이 덕에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'''위대한 인도주의자'''라고 칭송받았다. 인문학적 재능까지 출중했는데 1922년에 나온 그의 저서 중 하나인 <미국식 개인주의>는 미국을 정의하는 속성을 다룬 최고의 책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다. 당시 [[존 메이너드 케인스]]는 그가 '지식, 아량, 청렴성'을 갖췄다고 칭송하기까지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